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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역사관 상설전시

발해역사관 상설전시 _ 되살아나는 발해인
발해의 의생활
발해인 복식 추정도
발해인 복식 추정도

발해 초기에는 정치적·문화적으로 발해 지배 세력의 중심에 있었던 고구려인의 복식 문화를 계승하면서 우리나라 고유의 복식을 착용하였다. 이후 3대 문왕이 즉위하고 당나라로 파견되었던 사신들을 통해 당나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당나라의 복식 문화 요소가 도입되었다. 이후 발해의 복식 문화는 고구려 복식 문화와 발해 건국 이전부터 발해 영역의 토착세력이었던 말갈의 복식 문화 및 당 문화의 유입에 의한 새로운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반인들이 착용한 우리 고유의 복식

발해는 건국 초부터 고구려의 복식 문화를 계승하면서, 대부분의 발해 사람들의 복식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기마와 수렵에 능숙하고 활동적인 놀이를 즐겼던 우리 민족의 생활 방식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움직임이 편한 형태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 형태는 상의와 하의가 기본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남자는 좁은 소매와 곧은 깃의 상의[유, 저고리 유]와 좁은 폭의 바지[고, 袴]를 착용하였고 허리에 띠[대, 帶]를 두르고 여며 입었으며, 여자는 바지 대신에 치마[상, 裳]를 착용하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의복의 폭이나 재료, 색상에 차이를 두어 입었다.

이밖에 발해의 주민으로는 고구려 유민 외에도 말갈인들이 있는데, 전해지는 문헌의 기록을 보면, 말갈인들은 무기나 활과 화살의 생활에 익숙하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고구려와 유사하게 새의 꼬리를 관모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상류층이 착용한 관복(官服)

관복은 지배층이 집무를 행했을 때 착용하던 공식 복장으로, 시기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건국 초기부터 8세기 전반까지는 고구려의 제도와 문화를 바탕으로 국가를 정비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가 유지되면서, 상 ㆍ 하의가 분리된 일반인들의 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왕 즉위 후 당나라로부터 둥근 깃의 단령(團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의복을 들여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단령이 지배층의 관복으로 착용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정효공주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발해인들이 착용한 의복 부속품

허리띠 : 발해인들이 사용한 허리띠[대, 帶]는 과대(대구 과帶), 혁대(革帶) 두 종류가 있었다. 과대는 직물이나 가죽으로 된 대의 겉면에 장식판을 붙여 만든 허리띠로, 띠의 끝에는 버클 형태의 대구(帶鉤)를 걸어 띠를 고정시켰다. 혁대는 정효공주묘 벽화 인물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으로, 장식없이 대구의 고리를 걸어 착용하였다.

쓰개 : 벽화에서 묘사되고 있는 발해인의 쓰개는 두건 형태의 말액, 변형 조우관(變形 鳥羽冠), 복두(보자기 복頭)가 있다.

말액 : 정효공주묘 벽화에 묘사된 인물 중에서 시위(侍衛)가 착용한 것으로, 검은색 쓰개 위에 두건처럼 둘러 착용하고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고구려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 4명이 붉은색 말액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우관(鳥羽冠) : 우리나라 고유의 고깔 형태의 관모에 자연에서 채취한 새깃[조우, 鳥羽]이나 새 꼬리[조미, 鳥尾]를 꽂아 장식한 것으로, 새 깃을 관모에 장식하는 것은 계급이 높은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후 점차 관모에 장식하는 소재가 금속과 같은 딱딱한 느낌의 인공적인 소재로 변화하는데, 이것이 변형 조우관이다. 이는 발해 건국 초기부터 귀족들을 중심으로 착용되었을 것이다.

복두 : 문왕 즉위 후 단령과 함께 새롭게 유입된 품목으로, 층이 있는 검은색의 쓰개이다. 정효공주 묘 벽화의 인물을 통해, 뒤통수 부분을 장식하는 두 개의 각(脚)이 뒤로 길게 늘어뜨려진 형태[수각복두, 垂脚보자기 복頭]가 많이 보이는데, 이는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했던 형태였다.

발해인들의 장신구

발해에서는 비녀,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빗과 같은 다양한 장신구를 사용했음을 출토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녀와 빗은 피장자의 머리에 꽂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발해 여성들의 머리꽂이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귀걸이는 삼국시대부터 지배층의 남녀 모두가 착용했던 대표적인 장신구로서 귀에 닿는 환(環)의 굵기에 따라 세환식, 태환식으로 분류된다. 발해의 귀걸이는 신라 대부분의 귀걸이에 비해 다소 소박한 편이다. 목걸이는 구슬에 구멍을 뚫고 꿰어 만든 것이 대부분으로 재료는 수정, 마노, 호박, 벽옥 등이 사용되었다. 반지는 금·은·동으로 된 것이 출토되었는데, 장식이 없는 간단한 원형이다. 팔찌는 재료로 금·은·동·철이 이용되었는데 표면에 무늬가 없는 원형 혹은 타원형이 나타나고 있다.

발해인들이 옷을 만들 때 사용했던 재료

발해의 의복 재료는 크게 직물류, 가죽 및 모피류, 어피류의 세 종류로 분류되는데, 지리적 특징에 따라 가죽과 어피를 중심으로 한 의료가 대량 생산되었다.

직물류 : 문헌 기록에 의하면, “현주 지역에서는 布(포), 옥주 지역에서는 햇솜 면(면), 용주 지역에서는 紬(주)”가 생산이 되었다고 하므로, 발해에서도 직물을 직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의 지리적요건 때문에 다양한 생산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포[布, 마직물]가 발달하였다. 이밖에 발해의 용주에서는 주(紬)라는 평직(平織 : 날실과 씨실을 직각으로 교차하여 직물을 짜는 가장 기본적인 직조방법)의 비단도 유명했다.

옥주지역에서 생산된 면은 누에에서 뽑은 풀솜을 뜻하는 것인데, 이곳의 한랭한 기후조건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 양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 사신이 귀국 시에 항상 다량의 솜을 들여왔다.

발해는 지리적으로 다양한 직물, 특히 비단을 생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 않아 주변국인 당나라와 일본으로부터 다양한 직물을 들여왔다. 당나라로부터 수입한 직물류는 채련(綵練), 금(錦), 면(綿), 백(帛), 견(絹)이고, 일본과의 교류관계에서 수입한 직물의 종류는 나(羅), 능(綾), 금(錦), 견(絹), 양면(兩面), 채백(彩帛), 면(綿), 포(布), 사(실 사)로 그 종류나 수량에 있어서 견직물류의 비중이 크다.

가죽 및 모피류 : 발해의 영토에서 북부와 동부 지역은 산이 높고 삼림이 우거지고, 기후가 매우 추운데, 발해에 병합된 여러 말갈인을 중심으로 수렵과 어업이 주로 행해졌다.

문헌에는 초피(貂皮 : 담비가죽), 웅피(熊皮 : 곰 가죽), 호피(虎皮 : 호랑이 가죽) 등 다양한 가죽에 관한 기록이 있고, 이러한 획득물은 식용, 의복 재료 등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 수출품 등으로 중국 당나라나 일본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조정에서 환영받았다. 특히 발해인들이 일본으로 갖고 가는 담비로 된 모피는 일본 귀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어피류 : 발해는 동해에 인접해 있고, 송화강, 흑룡강, 우수리강 및 경박호 등의 내륙의 강이나 하천, 호수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산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생산된 어피류는 발해의 의료 외에 수출품으로 이용되었다. 발해에서 생산된 여러 수산물 중 의료로 사용했던 것은 치어(숭어 치魚), 해표피(海豹皮), 교어피(膠魚皮)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