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안내
발해역사관 상설전시
발해는 신라 ㆍ 당 ㆍ 일본과 육상과 해상을 통해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발해와 당과의 교류관계는 주로 책봉(冊封) ㆍ 하정(賀正) ㆍ 숙위(宿衛) ㆍ 유학(留學) 등으로 대별되나 일본과의 교류는 대부분이 경제적 교류였다.
발해와 일본과의 왕래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일본도(日本道)를 따라 일본의 노도(能登) ㆍ 치쿠시(筑紫) ㆍ 에치젠(越前) ㆍ 이즈모(出雲) 등지를 주로 이용하여 이루어졌다. 발해와 일본의 첫 번째 교류는 727년 발해 무왕(武王) 인안(仁安) 8년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高仁)과 덕주(德周) ㆍ 사나루(舍那婁) ㆍ 고제덕(高齊德) 등 24명을 파견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926년까지 일본을 34회 방문하였고, 일본은 발해를 13회 방문하였다. 이들의 왕래목적은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경제적인 목적에 의해서였다. 발해가 일본으로 수출한 것은 담비가죽 ㆍ 호랑이가죽 ㆍ 인삼 ㆍ 꿀 등 토산물이었고,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견(絹) ㆍ 면(綿) ㆍ 릉(綾)등 비단제품과 황금 ㆍ 수은 ㆍ 염주 등이었다.
발해 5경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서 천정군(泉井郡)까지 39역이 설치된 신라도가 있었다. 발해와 신라는 주로 이 길을 이용하였다. 발해는 건국 초기에 사신을 보내어 제5품의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았고, 신라는 원성왕대 '일길찬(一吉찬) 백어(伯魚)를, 헌덕왕대에는 '급찬(級飡) 숭정(崇情)을 북국(北國)에 파견하였다. 757년에 동경용원부에서 경주에 이르는 신라도(新羅道)에 위치한 천정군(泉井郡)을 정천군(井泉郡)으로 개칭하고, 탄항관문(炭項關門)을 설치하여 내외의 차단과 대외교섭창구로 활용하였다.